삼포왜관(부산포, 제포, 염포)이 임진왜란 후 두모포 왜관으로 다시 1678년 초량왜관으로 변화한 것은 모두 조선이 허가해 준 것인데 이를 ‘소씨왜관’이라 하여 대마도주의 사적왜관으로 기술함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대등한 관계를 맺고”라는 부분은 일본과 조선의 대등한 관계가 계속 지속된
1. 일본 열도의 인종 변화에 관한 여러 학설에 대하여 논하시오. (4점)
일본 열도의 인류의 역사는 약 10만 년 전에서 약 3만 년 전 사이에 시작되었다. 당시의 일본 열도는 아시아 대륙과 붙어있었기 때문에 시베리아나 화베이 일대의 몽골 인종과의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다. 유라시아 대륙과 연결되
1. 일본 열도의 인종 변화에 관한 여러 학설에 대하여 논하시오.
일본 열도의 인종 변화에 관한 학설들은 조몬인-야요이인-현대 일본인의 순으로 혹은 대신 아이누인을 순서에 넣어 열도의 주류 인종이 바뀌어왔다고 주장하는 교대설, 조몬인을 기조로 하여 대륙의 이주민들과 조몬인의 혼혈로 현재
삼포제도(三浦制度)를 확립, 제포 30호, 부산포 20호, 염포 10호의 왜관을 설치하여 항거(恒居)왜인을 거주하게 하면서 도항왜인의 접대와 교역을 허가하였다. 이와 같이 왜관은 왜인들의 행동의 제한, 국가기밀의 누설방지, 국방상의 이유로 접대처와 교역처를 한정시키기 위하여 비용을 부담하면서 특
고려사에 왜구가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고종 10년인 1223년이다. 당시 고려는 몽골 침입으로 전쟁을 치르던 상황이었다. 이후 11차례나 고겨를 침입한 왜구는 고려가 원에 복속되고 1274년 고려와 원의 연합군이 일본 정벌에 나서자 약 80년간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14세기 더 강력한 왜구가 등장하여
<서론>
1. 삼포란?
조선초기 일본일들의 왕래와 거주를 허가하였던 남동해안의 세 포구. 지금의 부산진에 해당하는 동래의 부산포와 지금의 경상남도 진해시에 해당하는 웅천의 내이포(제포), 마지막으로 경상남도 방어진과 장생포 사이에 해당하는 울산의 염포를 말한다. 부산포진은 동래현의
. 들어가는 말
태조는 즉위 직후 무로마치 막부에 승각추를 보내 왜구의 금압, 붙잡혀간 조선인들의 송환을 요구하고 동시에 수호할 것을 요청한다. 이에 족리의만은 사신을 보내 붙잡혀간 조선인 100명을 송환하면서 조선측의 요구를 적극 수용하겠다는 자세를 보인다. 그러나 이 시기는 아직 족리
삼포왜관도」에도 "동래현부산포"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이때의 부산포는 '富'자를 사용하고 있다. 1481년(성종 12)에 편찬되고 그후 여러번 증보된『동국여지승람(1481)』산천조에 보면, "부산은 동평현(오늘날 당감동 근처)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같이 이름하였는데 그 밑이 곧 부산포이다
,『경상도지리지(1425)』『세종실록지리지(1454)』『경상도속찬지리지(1469)』등에 "동래부산포(東萊富山浦)"라 하였고, 1471년 편찬된 신숙주의『해동제국기』에도 "동래지부산포(東萊之富山浦)"라 하고, 같은 책「삼포왜관도(三浦倭館圖)」에도 "동래현부산포(東萊縣富山浦)"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왜관 밖을 나가나 말 것, 조선인 앞에서 큰 소리 치지 말 것, 싸움을 할 때 상대를 때리지 말 것, 조선인이 참석하는 자리에는 최소한 국 2가지와 반찬 7가지를 준비할 것 등 왜인들은 조선인과 가깝게 지내면서도 얕잡아 보이지 않기 위해 상당히 신경을 썼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삼포를 번